D-55
공무원이 된 후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공무원이 어떤 직업인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시생 때의 나는 어떻게 하면 공무원 시험에 빨리 합격할 수 있는지, 오로지 그것만 궁금했다. 그래서 매일 공무원 합격수기만 주구장창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공시생이 있다면 칭찬해주고 싶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방법보다 공무원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일이 내 적성에 맞을지를 알아보는 게 우선이니까.
공무원이 되겠다고 결심했다면, 신중하게 고려해야할 것이 하나 더 있다. 큰 틀에서는 국가직 공무원이 될 것인지, 지방직 공무원이 될 것인지인데 사실 대부분의 공시생들은 국가직 지방직을 가리지 않으니 이건 중요치 않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직렬이다. 맨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나는 정말 뭣도 모르고 검찰사무직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도 황당하다.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드라마 작가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검찰사무직이 되면 범죄드라마나 법정드라마를 쓰기 위한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만에 국가직 시험을 치렀고, 지방직 시험을 접수할 때쯤 나는 검찰사무직은 지방직을 뽑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더는 없길 바란다.
그렇게 검찰사무직을 포기하고, 나는 더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행정직을 목표로 공부했다.
행정직은 지방직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조직에서 주류로 여겨진다. 가장 다양한 일을 하고, 승진도 빠르지만 기술직들은 아마 행정직 해달라고 사정해도 안 할 확률이 크다.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기술직 공무원들은 행정직 업무가 제일 별로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행정직을 기피하는 이유는 첫째, 전문성이 없다. 둘째, 상사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한다. 셋째, 자질구레하고 귀찮은 일이 많다. 이외에도 엄청난 이유들이 있겠지만 기술직으로 살아보지 않아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직렬로 들어왔다면 내가 몇 년쯤 더 국가의 녹을 먹으며 살았을까? 하지만 여기에 들어와서야 이렇게 다양한 직렬이 있고, 전공을 하거나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다른 직렬도 많다는 걸 알았다.
그동안 일하며 알게 된 지방직 공무원 직렬에는 행정, 세무, 사회복지 등 한 지자체에서 뼈를 묻는 세가지 직렬과 시 단위의 인사발령을 받는 나머지 직렬들이 있다. 거기에는 시설직(토목, 건축, 지적직)과 공업직(기계, 전기, 화공직), 농업직, 녹지직, 수산직, 환경직, 보건직, 간호직, 의료기술직, 사서직, 방재안전직, 운전직, 속기직, 전산직, 방송통신직 등이 있다.
요즘 시국에 최악의 직렬로 꼽히는 직렬은 아무래도 방재안전직과 보건직, 간호직, 의료기술직 등 코로나 관련 직렬일 것이다. 그 분들은 1년이 넘게 주말없는 삶을 살고 있다.
대체로 직원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렬에는 사서직과 지적직이 있다. 사서직 같은 경우는 진심으로 사서직이 꿈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고(행정직공무원이 꿈인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못 봤다) 지적직의 경우에는 일이 깔끔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직렬은 모두 자격증이나, 대학 졸업 같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해서 아무나 도전할 수가 없다. 이 직렬들이 진짜 좋은지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지만, 행정직은 해보지도 않고 다들 싫다고 하는 걸 보면 아마도 행정직보단 좋은 게 맞지 싶다.
요즘은 유튜브나 블로그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부디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알고 준비하길 바란다. 직렬도 아직 선택할 기회가 남아있을 때 더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빨리 합격하는 것도 좋지만, 천천히 가더라도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안 그럼 나처럼 다 늙어서 사춘기를 겪는다.
그리고 행정직 하지말라고 말리는 건 절대 아니다^^
'퇴사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무원 퇴사일기] 업무시간에만 연락하게 하는 법 (0) | 2021.05.08 |
---|---|
[공무원 퇴사일기] 인사교류, 퇴사보다 더 나은 선택인가? (0) | 2021.05.07 |
[공무원 퇴사일기] 공무원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몰라? (0) | 2021.05.05 |
[공무원 퇴사일기] 국장 정도는 될 줄 알았지 (0) | 2021.05.04 |
[공무원 퇴사일기] 가족같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0) | 2021.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