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3
나는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다. 유치하게도 싫은 사람에게는 싫은 티를 내고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티를 낸다.
웬만큼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싫은 티를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그 싫은 티는 의외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좋은 것 중에 하나는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업무시간에는 꼭 필요한 전화를 하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나를 대하는 게 불편해서 전화를 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티 내기의 핵심은 말보다는 표정과 행동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로 싫은 티를 내면, 싸우자는 뜻이니 자제해야 한다. 싫어하는 사람이 하기 싫은 일을 부탁할 때는 거절하기보다는 일단 해주면서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다. 일단, 도대체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 지은 채 "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내내 심각한 얼굴로 연신 한숨을 내쉬는 등 최대한 힘든 내색을 한다. 그렇게 몇 번 하고 나면, 불편해서 더는 부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계속 온다? 그러면 눈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니 깔끔하게 포기한다.
적다 보니 퍽 꼴 보기 싫은 모습이긴 하지만, 꽤 효과적이라 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사람이 좋은 탓에 이 부탁, 저 부탁 다 들어주는 직원들에게는 낮이든 밤이든 주말이든 상관없이 전화가 걸려오고, 심지어 이들은 다른 부서로 인사발령이 나고 나서도 온갖 전화에 시달리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
나와 같은 방법을 쓰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연락이 안 오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서는 연락이 올 수 있다. 아무리 좋아해도 회사 사람과는 주말에 통화하기 싫다,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다지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면 언제든 기쁘게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속해 있는 팀의 팀원들은 밤낮이나 휴일을 가리지 않고 카톡을 한다. 단체 카톡방을 통해 급한 업무 내용을 공유하기도 하고, 가끔은 주말에 갔던 좋은 관광지를 추천하거나, 맛집을 알려주는 등 사적인 이야기들을 하기도 한다. 내용을 보든지 말든지, 답장을 하든지 말든지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단 한 번도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팀원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전제로 깔린다.
우리 팀이 이렇게 연락을 자주한다고 말하면, 놀라는 사람들도 많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잊고 있었는데, 실제로 다른 부서에서 일할 때는 단톡방을 만든 적조차 없었다. 혹시 '모든 공무원 조직에서 이렇게 하나?'하고 겁먹었다면, 그럴 필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업무시간 외에 연락을 받는 것이 싫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는 것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업무시간 외에는 연락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소심한 인간인 내가, 싫은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온 스컹크의 방귀 같은 전략이랄까. 직접 때리지 못하니 방귀라도 뀌어서 도망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퇴사를 하고 나면,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누구든 전화 좀 걸어주길 바라게 될까봐 조금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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