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6
5월 15일이 스승의 날이라는 것을 잊고 지낸 지 오래되었지만, 이제 다른 의미로 이 날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다.
공무원 중에서도 재난부서에서 일을 해본 사람에게 5월 15일은 여름의 시작, 그러니까 여름철 재난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날로 기억된다. 왜냐하면 우리 기관에서는 5월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를 특히 재난을 조심해야 하는 기간으로 지정하고, 일반 당직 외에 별도의 당직을 서며 여름철 자연재난에 대비하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에게 여름은 무척 공포스러운 계절이다. 여름이면 예외없이 찾아오는 태풍과 장마 때문에 새벽에 불려 나오거나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재난의 정도에 따라서 필요한 인원만큼 비상근무조를 짜두고, 재난상황이 생길 때마다 재난부서에서 비상근무를 소집한다. 자신의 비상근무 차례가 돌아오면, 유독 날씨에 민감해져서 기상청에 수시로 들어가 태풍이 언제쯤 우리나라를 지나갈지 예측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러다 태풍이 코앞까지 오면, 집에 못 올 각오를 하고 세면도구를 챙겨 출근하기도 한다.
그나마 재난부서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재난부서에 있을 때는 태풍이 올 때마다 근무조에 상관없이 매번 출근해야만 했다. 누가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겪어보면 누구라도 마음 편히 집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재난 관련부서의 고통은 태풍이 지나간 후에 시작된다는 것이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를 치우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조사해 지원금을 지급하는 일은 다시는 구경조차 하기 싫을 만큼 고된 일이다.
본격적으로 태풍이 찾아오는 7월이 되면, 나는 이 곳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태풍이 올 때, 비닐하우스가 날아갈까, 저지대에 있는 집들이 침수될까, 농작물이 물에 잠길까, 같은 걱정대신 우리 가족의 안전만 걱정하면 된다는 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비상근무가 남일이 되더라도 올해만큼은 태풍이 조용히 지나가고, 장마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코로나로 충분히 힘든데, 자연재난까지 감당하기엔 모두에게 너무 버거우니까.
'퇴사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무원 퇴사일기] 요샌 사직이 유행인가? (0) | 2021.05.17 |
---|---|
[공무원 퇴사일기] 마리오카트가 알려준 꼴찌의 즐거움 (0) | 2021.05.16 |
[공무원 퇴사일기] 1월 1일에 받는 웬 떡, 복지포인트 (0) | 2021.05.14 |
[공무원 퇴사일기]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 (0) | 2021.05.13 |
[공무원 퇴사일기] 우편봉투 속에서 초콜릿을 발견했을 때 (2) | 2021.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