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5
오랜만에 조카와 마리오 카트를 했다. 어느새 10살이 된 조카는 더 이상 일부러 져주지 않아도 나를 압살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게임에 대해서만큼은 신생아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관심도 없고 재능도 없다. 그런 것에 비해서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승부욕이 발동해서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드는 통에 어린 시절에는 나와 게임을 해주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많이 사회화(?)되어서 지는 것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이기는 것이 좋다. 비단, 게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전임자보다 잘하고 싶고, 후임자보다 잘했다고 기억되고 싶다. 유치하지만 옆사람보다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누구에게든 고맙다거나 잘했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더 열심히 할 때도 많다. 이기적인 마음이긴 하지만, 그런 뭣 같은 성격이 지금까지 나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마리오카트는 나에게 미적분보다 더 어렵다. 아무리 뭣 같은 성격을 발휘한다고 해도 마리오 카트만은 도무지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무려 다섯 판을 연달아 12등, 즉 꼴찌로 달렸다. 그것도 바로 앞 주자와 역전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격차를 두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를 갖고 내가 가는 길을 천천히 보게 되었고, 달리다가 벼랑에서 떨어져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가끔, 1초 정도 11등을 할 때도 있었는데, 그 기분이 썩 짜릿했다.
반면 1등으로 달리고 있던 조카는 뒤쫓아오는 2등, 3등에게 자리를 뺏길까봐 조마조마해 보였다. 그리고 1등을 하다 한순간의 실수로 벼랑에서 떨어져 9등이 됐을 때는 엄청난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세상에 1등이 되기 싫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1등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알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자주 스스로가 꼴찌라고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마리오카트 덕분에 이제부터는 꼴찌라도 즐거울 수 있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으니 부담도 없다. 그냥 조용히 내 갈 길을 가다 보면 가끔은 11등이 되는 짜릿한 경험도 할 수 있다.
마리오 카트는 냉정하게도 꼴찌가 결승선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아서 한 번도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내 생각에 세상은 마리오 카트보다는 다정하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게임을 끝내지 못하니까 말이다.
내가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을, 우리 조카는 일찍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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