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6
퇴사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수능을 치르자마자 나는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다. 열 가지도 넘는 아르바이트를 해보며 그만두는 데 도가 트였다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모든 순간 나는 망설였고, 미안했다.
5년 넘게 일주일에 다섯번, 가끔은 일곱번도 드나들던 이 곳을 떠나는 일은 결심부터 쉽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퇴사를 번복한 적이 있었기에, 더 큰 확신이 필요했다. 확신이 생긴 후에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망설이다가는 또 이대로 멈춰버릴 것 같았다.
보통 퇴사 통보는 퇴사하기 한 달 전에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지만, 나는 도저히 내 자리를 비워둔 채 떠날 수는 없었다. 갑자기 퇴사를 하거나, 휴직을 해버리는 바람에 남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그 업무를 떠안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퇴사 이유가 지긋지긋한 동료들 때문이었다면 '맛 좀 봐라.'하고 홀연히 사라질 수 있었겠지만, 나의 동료들은 정말이지 최고였다. 나의 퇴사가 그들에게 줄 충격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미안했다.
앞으로 두 달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는 정기인사를 데드라인으로 잡고, 만약 그 안에 복직자나 신규직원이 들어오는 행운이 있다면 조금 일찍 그만두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그러고나니 퇴사를 통보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계장님께 어떻게 내 뜻을 전달하면 좋을지, 오래 고민했다. 계장님을 불러내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차 한 잔 하시죠." "날씨가 좋은데 같이 산책이나 하실까요?" "면담 요청합니다." 너무 인위적이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계장님을 낚아챌까, 창고에 들어간 계장님을 따라 들어갈까, 하던 중에 하늘이 나를 도왔는지 우연히도 계장님과 단 둘이 회의실에 갈 일이 생겼다. 업무 이야기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계장님을 붙잡고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제가.. 퇴사를 하려고 하는데요..."
퇴사가 무슨 큰 죄라도 되는것처럼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의외로 계장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를 물으셨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는 유치원생 같은 핑계를 댔지만 계장님은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네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너무 아까우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어떤 결정을 하든 지지할 테니까."
세상에, 내가 얼마나 복받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했다. 이런 따뜻한 배려에 녹아 첫 번째 퇴사 기회를 날려버린 나니까. 그 후로 계장님은 나의 퇴사를 모르는 것처럼 태연히 행동하며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안도와 걱정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말을 꺼냈다는 안도, 이제 겨우 한 명에게 말했는데 언제 그 많은 고마운 이들에게 이 소식을 다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빛보다 빠른 공무원 집단의 소문이 이번만큼은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다. 비겁하지만 내 입으로 모두에게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너무 비겁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더 비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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