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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한 달에 한 권씩, 독서통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짜 책을 받을 수 있다. 예산이 부족해서 1년 중 7개월 정도만 하는데 그래서인지 경쟁률이 꽤나 치열해서 신청기간이 시작되자마자 신청하지 않으면 금세 마감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다. 사람들은 매월 대학교 수강신청을 하듯 열심히 책을 고르고 출근하자마자 교육을 신청한다.
월말이 되면 다음 달 책이 사무실로 배송된다. 한 달 동안 책을 읽고, 독후감 약 1,000자 정도를 제출하면 3시간의 교육시간을 받을 수 있다. 독후감을 쓰지 않으면, 교육시간을 못 받는 것은 물론 다음 달부터 교육에 참여할 수 없는 엄청난 불이익이 주어진다.
매월 독서통신교육이 끝나면, 어떤 사람이 무슨 책을 선택했고 수료를 했는지 못했는지를 볼 수 있는데 이게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고르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식으로 돈을 벌고 싶은 사람에게는 주식책이, 마음이 복잡한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위로하는 책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자연히 나는 퇴사와 관련된 책들에 관심이 갔지만, 어쩐지 그 마음을 너무 빨리 들키고 싶지 않아서 여태 한 번도 신청하지 못하고 직접 사서 읽곤 했다.
작년에 밀리의 서재를 이용한 후로는 전자책을 보는 것에 익숙해진 데다, 책을 읽는 속도가 서재에 관심있는 책을 담는 속도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다른 책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한동안 독서통신교육을 신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 것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6월 교육을 신청해두었다.
오늘 연가 플렉스를 시작하고 집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택배기사님에게 택배가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카드 결제내역을 뒤져봐도 택배를 시킨 적이 없는데... 혹시 누가 선물을 보낸 건가 설레기 시작하던 순간 슬프게도 그 택배가 바로 독서통신교육업체에서 보낸 6월 교육도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신청한 책은 김초엽, 김원영 작가가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이다. 김원영 작가는 서울대, 김초엽 작가는 포항공대를 나온 엘리트들인데 글까지 잘 쓴다.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왜 더 열심히 살지 못했나, 나를 다그치게 된다.
내 눈에 한없이 대단해보이는 작가들도 나와 같은 자책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루어야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길 수 있을까.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갈 길이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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