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공무원 퇴사일기] 인계인수서에 미친 자

수트레스 2021. 5. 2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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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퇴직자들 중 공무원 생활을 하며 힘든 점으로 "인계인수가 잘 되지 않는다"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사기업에 다녀본 적이 없어서 사기업은 어떤 식으로 인계인수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곳이 인계인수가 어려운 곳이란 것은 확실하다. 신규직원이나 휴직, 퇴직자가 아닌 이상 인사이동이 있을 때마다 하던 업무를 넘겨주는 동시에 새롭게 하게 될 업무를 넘겨받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인데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하니 더 중요하고 급한 쪽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각자 눈앞에 닥친 업무를 어떻게든 쳐내기 위해 스스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예전 자료들과 법령을 뒤진다.

이럴 때는 전임자가 정리해둔 인계인수서가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인사이동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 미리 인계인수서를 준비하지 않는다. 인사발령이 나면, 2~3일의 짧은 기간 동안 부랴부랴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벼락치기 인계인수서를 만드느라 야근을 면치 못했었다.

퇴사를 결심한 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인계인수서를 만들었다. 만들고 나면 또 새로운 업무가 튀어나오고, 잘 쓰던 시스템을 바꾼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자주 인계인수서를 갈아엎어야 했지만 그래도 인계인수서를 만들다 보면 퇴사에 한걸음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조직에서 완전히 떠나는 사람을 전임자로 두면, 궁금한 것이 있어도 선뜻 물어보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아는 것은 모조리 적어넣었다. 뭐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내가 만든 인계인수서가 쌓여갈수록 작품 하나를 쓰는 것처럼 뿌듯하기까지 했다.

한 번은 인계인수서를 너무 길게 써서 "쟤는 미친 애"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인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인계인수서를 만들며 눈을 반짝이는 나를 볼 때면, 나조차 스스로가 인계인수서에 미친 자인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전임자가 했던 방식이 무조건 맞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전임자의 방식을 100퍼센트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인계인수서를 정성껏 만든들 이것은 100퍼센트 믿을 수 있는 자료는 결코 아니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난 오늘도 열심히 인계인수서를 고쳐 썼다. 인계인수서에 미친 자답게.

간혹 자신이 힘들게 알게 된 정보를 쉽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며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들을 모두 지우고 가는 악덕한 전임자들도 있다고 한다. 부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계인수서 만들기는 생각보다 즐거우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도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나누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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