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9
우리 동네에서 제일 높은 산에 다녀왔다. 그래 봤자 해발 500미터가 조금 넘는데, 그걸 오르면서도 나는 내내 폐가 터지도록 숨을 몰아쉬었다. 산을 오르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너무 힘들다." 혹은 "죽을 것 같다."였다. 다리가 좀 아프고 숨이 찬다고 죽을 리도 없거니와, 정말 죽기 직전이라면 그냥 내려오면 될 텐데 꾸역꾸역 끝까지 올라갔다.
온몸이 천근만근인 나를 비웃듯이 나비는 유난히 가벼운 몸짓으로 내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냥 날아가면 될 걸 뭐하러 힘들게 걸어가느냐는 듯이. 내 숨 하나 조절 못하는 내가 나비보다 잘하는 게 있긴 할까.
여러 번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면서도 나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가며 결국 정상에 올랐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역시 옳았다. 산의 이름이 적힌 비석 앞에 서자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제 내리막길만 남았고, 어디서든 내려가는 것은 쉬운 일이니까.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내려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했고 심지어 미끄러져 넘어지기까지 했다. 발가락이 운동화 앞코에 바짝 밀려난 채로 1시간을 넘게 걷다 보니 잘하면 발톱이 빠질 것도 같았다.
내리막길조차 지긋지긋해질 무렵, 드디어 등산로에서 벗어나 아스팔트 길에 설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겨우 3시간동안 나는 오랜 지옥과 짧은 천국을 맛봤다.
하지만 진짜 천국은 맛있는 오리불고기와 에어컨 바람 아래 있었다. 일단 천국에 들어서고 나니. 놀랍게도 지난 3시간의 고생은 어느새 기억 저 구석으로 밀려나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상에서 찍은 끝내주는 사진뿐이었다.
이 신기한 현상을 알게 된 것은 사실 꽤 됐다. 아무리 힘들고 죽을 것 같은 상황도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닌 것이 된다는 것 말이다. 가끔은 그 고통들이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노라는 건방진 이야기까지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힘든 순간에 이 사실을 떠올리고 당장 별일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까 힘들 땐 그냥 힘들어야지 뭐 어쩔 수 있나.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지나간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퇴사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무원 퇴사일기] 자가격리자 없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 (0) | 2021.05.24 |
---|---|
[공무원 퇴사일기] 하기 싫은 일을 안 하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0) | 2021.05.23 |
[공무원 퇴사일기] 인계인수서에 미친 자 (0) | 2021.05.21 |
[공무원 퇴사일기] 공짜책 받는 재미, 독서통신교육 (0) | 2021.05.20 |
[공무원 퇴사일기] 신규교육의 추억 (0) | 2021.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