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2
퇴사 후 나의 삶을 상상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아무렇게나 펼친 돗자리, 키 큰 나무가 만든 시원한 그늘, 살랑살랑 부는 바람, 상쾌한 공기와 온도. 나는 나무 기둥에 기대앉아 책을 읽는다. 이건 마치 내 모든 행복의 조건을 모아놓은 것 같다.
자연은 우리에게 먹을 것만 주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위로해주는 엄마 같은 존재다. 아기가 엄마의 품에서 안정을 얻듯이 우리는 자연과 가까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을 뿐인데, 그 존재만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준다.
다른 사람들도 이걸 행복이라 여긴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오늘도 공원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낮잠을 자고 수다를 떨었다. 눈부신 햇볕과 시원한 바람, 어디를 바라보아도 반짝이는 풍경들. 오늘은 나들이의 날로 지정해도 아깝지 않은 날이었다. 마치 한 폭의 명화 같은 장면들을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남은 생은 매일이 나들이 같은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설레지만 편안하고, 익숙하지만 아름다운 날들.
나는 이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큰 모험을 선택했다. 어쩌면 나들이 좋아하다 매일 밤 공원에서 잠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미 상상해버린 미래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아마 많은 것들이 내 상상과는 다를 것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찌질한 미래가 오더라도 나는 아마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 나는 공원세권에 살고 있으니까. 언제든 내가 힘들 때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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