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5
오늘은 2021년 지방직 공무원 시험이 있었다. 지난번 국가직 공무원 시험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지방직 시험에도 감독관으로 차출되고 말았다.
내가 합격한 시험이 바로 2015년 지방직 시험이었는데... 오늘이 마지막 시험감독이라서인지 6년 전 시험을 쳤던 그 순간이 많이 떠올랐다.
몸에 밴 아웃사이더 기질 때문에 어딜 가나 구석자리를 좋아하는데 그날은 하필 완벽한 정중앙 자리를 배정받았다.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매일 아침밥을 챙겨먹는 내가, 유일하게 아침밥을 못 먹는 날이 있는데 바로 시험을 치는 날이다. 그날도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집을 나섰고, 걱정했던 대로 시험 시작도 전에 배가 고파왔다. 시험이 시작되고 숨 막히게 조용한 가운데, 정중앙 자리에 앉은 내 배에서 엄청난 굉음이 퍼져나갔다. 시험 내내 밥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배를 부여잡은 채 찌질하고 이기적인 생각들로 나를 위로했다.
"나의 요란한 꼬르륵 소리에 방해받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를 이길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정신승리를 이뤄낸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그랬던 걸까. 그 날은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다. 시험 시작종이 울리고 시험지를 펼쳤는데 마치 합격의 신이 내린 것처럼 정답이 손을 들고 뛰쳐나오는 것만 같았다.
시험이 끝나고 시험장을 나서는데 처음의 찝찝했던 기분은 온 데 간 데 없고 느낌이 아주 좋았다. 나중에서야 그 해의 시험이 유독 쉬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합격의 신이 오다 말았다는 것도 깨달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커트라인 안에 들 수 있었고, 그다음 해에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오늘 아침, 아빠가 공무원시험 경쟁률에 관한 뉴스를 보시며 어려운 시험 합격해놓고 그만두는 게 아깝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아빠 생각이 틀렸다고, 아까울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시험장에 가보니, 6년 전 교실 정중앙에 앉아서 누구보다 열심히 시험을 쳤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코 끝이 찡해졌다.
감지 않아 질끈 묶은 머리와 다 보지 못할 걸 알면서도 바리바리 챙겨 온 책들. 혹시 늦을까봐 아침 일찍 집을 나서고, 시험장을 잘못 찾아갈까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확인했던 그때, 정말 나는 진심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때 나의 선택과 노력이 틀렸다고 비난하는 것만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렇다고 계속 다니자니 지금의 나에게 미안해질 것 같아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은 현실의 나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러거나 저러거나 오늘 우리 시험장에 있었던 모든 분들이 합격의 기쁨을 누리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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