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3
지난달부터 75세 이상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 백신접종센터를 만들었으니 "어르신들~ 접종하러 오세요!" 하면 끝날 줄 알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명단을 추출하고, 어르신들을 찾아가 동의서를 받고, 접종 날짜를 정하고, 일일이 전화를 돌려 접종센터까지 어떻게 이동할 건지 묻는다. 이동수단이 없는 어르신들을 수송하기 위해서 전세버스를 계약하고, 날짜와 시간, 픽업장소가 정해지면 어르신들에게 다시 연락을 돌린다. 여기까지는 내가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니 실제로는 더 어마어마한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접종 버스에 타시는 어르신들을 인솔하기 위해 지원을 나갔다. 접종 당일에 버스 탑승을 예약한 어르신들을 싣고 접종센터로 가야 하는데, 담당부서와 동행정복지센터에서 모두 소화하기 힘든 상황이라 전 부서에서 지원을 나가야 한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버스가 오기도 전에 몇몇 어르신들이 먼저 나와계셨다. 하지만 일부는 출발시간이 코앞인데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노쇼인가. 우리 직원들이 몇 백, 몇 천 통의 통화를 해서 겨우겨우 작성한 탑승자 명단인데 그분들에게는 말없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별 것 아닌 약속이었나 보다. 나는 그중 단 한 통의 통화도 하지 않았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 어르신들 때문에 애달복달하는 담당자를 보니 나까지 마음이 짠했다.
접종센터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번호표를 받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예진표를 작성했다. 약해진 관절 때문에 버스에 올라타는 것조차 힘들고, 예진표에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어렵기만 한 어르신들을 보니 접종을 하러 온 것 자체가 그분들에게는 큰 도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걱정과는 달리 어르신들을 시종일관 무서운 기색 하나 없이 모두 씩씩하게 접종을 마쳤다.
앞으로 내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나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 버스에 올라탈 수 있을 만큼 약해질 것이다. 이 젊음을 아끼지 않는다면 70살의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몇 개나 남아있을까?
그러니 무언가를 하려거든 당장 시작해야 한다. 한 살씩 먹어가며 용기를 잃을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도록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늙어간다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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