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공무원 퇴사일기] 뚜벅이 직장인의 설움

수트레스 2021. 6. 15.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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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퀴 달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것에 대해 지독한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겨우겨우 자전거를 배우긴 했지만, 30년 가까운 경력이 무색하게 평지에서 조깅하는 속도로 탈 수 있을 뿐 조금이라도 경사진 곳이 나오면 바로 자전거에서 내려 걷는 허접한 실력이다.

그래서 내가 평생 동안 운전을 하지 못할 줄 알았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를 내 손으로 모는 일은 죽을 각오를 한 뒤에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장에 다니다 보니 웬걸. 원거리 출장도 잦고, 짐을 옮길 일도 많아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 힘든 상황이 자꾸 생기는 게 아닌가. 출퇴근이야 남들보다 좀 일찍 나오고 여름엔 덥게, 겨울엔 춥게 걷고 뛰며 서러워하면 그만이지만 출장은 도저히 그런 걸로 때울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었다. 나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해야 하는 동료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무능해 보이는 게 싫었다.

결국 입사 2년 차에 운전면허를 따기로 결심했다. 운전에 소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장내기능까지는 시동 켜고 브레이크만 밟을 줄 알면 통과되는 헐렁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도로주행이었다. 교차로에서 신호위반, 시속 3킬로로 주행, 코스 미숙지, 핸들 조작 미숙 등등 나를 탈락시킬 이유들만 넘쳐났다. 결국 도로 연수비로 100만 원 가까이 쓴 뒤에야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운전면허증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로주행을 무려 다섯 번만에 합격한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과연 누가 타고 싶을까. 몇몇 간 크신 분들이 목숨을 걸고 내 옆자리에 타는 아량을 베풀어주었지만, 짧은 운전연수 몇 번으로는 실력이 도무지 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큰맘 먹고 차 한 대 뽑을까도 생각했지만 차를 산다는 것은 나에게 퇴사 포기 선언과도 같았다.

그렇게 나는 아직까지도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염치없이 얹혀 다니는 신세다. 5년 넘게 이렇게 살다 보니 신세 지는 데에도 많이 익숙해졌다. 신세를 질 때는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1. 고마운 마음을 충분히 표시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태워주고 싶어 진다.
2. 최대한 내비를 열심히 본다. 가끔 길이라도 잘못 들면 내 탓인 것만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3. 상대의 신경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잠을 자거나,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는 눈치 없는 행동은 금물이다.

뚜벅이 직장인으로 살아본 사람으로서,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입사하는 것을 추천한다. 어딜 가나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환영받는다. 다만, 운전을 잘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쯤은 운전직 공무원이 되어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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