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공무원 퇴사일기] 원칙주의자로 사는 고통

수트레스 2021. 4. 22.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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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9

나는 원칙을 싫어하는 원칙주의자다.

원칙이 생기는 순간, 그것을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원칙들로 가득한 공무원 사회에서 버티기가 더욱 힘이 들었다.

공무원이 지켜야할 가장 크고 무거운 원칙은 "법"이다. 나는 스스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여기며, 정말 법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 세상에 이렇게 많은 법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 법들을 다 지켜가며 일해야한다니 막막했다.

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문제는 불필요한 대장 작성, 별별 이름을 다 갖다붙인 각종 교육 등등 공무원들을 괴롭히기 위해 만든 것만 같은 조항들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 현장에서 지키기 어려운 것들을 잔뜩 요구하고, 뭐라도 빠뜨리면 감사에 걸렸다며 확인서를 들이민다.

아예 그 존재를 모른다면 모를까, 알게 된 순간부터는 괴로움의 연속이다. 중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데 생략할까, 그래도 알게 된 이상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볼까. 하더라도 완벽하지 못해서 답답하고, 안 하면 불안함에 속이 타들어간다. 어떤 쪽도 최선이 아니다.

나란 사람은 아무리 바빠도 초록불이 될 때까지 기다려 길을 건너고, 길에 실수로 떨어뜨린 쓰레기도 다시 주워야만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람이다. 신호를 위반하는 사람만 봐도 화가 나는 유별난 사람.

그래서 자주 나에게 화가 났다. 특히 내 힘으로 결정하거나 컨트롤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모든 일은 답정너(답은 정해져있어, 너는 일만 해)였지만 나는 정해진 것들도 완벽히 해내지 못했고,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물론, 누군가는 나를 이해 못할 것이다. 실제로 이 조직에는 정해진 업무를 하는 것이 좋고 편한 사람들이 많고, 그들은 나와 달리 그 일들을 잘 해낸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는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고 싶은 나같은 사람이 외계인이 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조직과 같은 방향으로 걸었지만, 줄곧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를 나가면, 나만의 원칙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내게 만만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가지 않은 험한 길을 선택할지언정 답이 정해진 길을 택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어떤 주제로 일기를 쓸까. 이모티콘은 어떤 표정으로 그릴까.
이렇게 작고 대단하지 않은 일일지라도, 커다란 자유로움 속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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