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67
나는 매일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음대로 쓸 수 없는 평일 9-18. 이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항상 쫓기듯 조급하다.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거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유튜브만 보다 잠든 날에는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린다.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강박은 일상생활 곳곳에서 삶의 여유를 빼앗는다.
오늘은 배달앱 오류로 두 번이나 주문이 취소되는 바람에 잔뜩 화가 났다. 10분 전 주문을 해두고 식당에 도착해 포장된 음식을 바로 픽업하겠다는 완벽한 시간계획을 짰는데, 그것이 흐트러지자 분노가 밀려왔다. 어째서 이게 화낼 일이란 말인가. 이런 것에 화를 내는 내 자신이 싫어서 더 화가 났다.
낭비한 10분이 나에게는 책 몇 페이지를 더 읽을 수 있고, 글 몇 자를 더 적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에 화가 나는 걸까. 그렇다면 나에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을만큼 시간이 많아진다면 성인군자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그때는 시간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실 이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쉬는 공간이 많아지는 것이다. 머리는 온갖 생각들로 가득차있더라도, 마음에는 늘 여유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공간이 아주 넓고 커서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넓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소중한 시간을 빼앗겨도, 생산적이지 않은 일에 하루를 쏟아부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오늘부터 마음을 넓히는 데 시간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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