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2
그만두기로 결정한 후로 벌써 세 개의 청첩장을 받았다.
첫 번째는, 내가 맡고 있는 단체의 임원의 아들의 결혼식이었다. 엄마 친구 아들보다 더 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결혼식이지만 나는 가야했다. 왜냐. 저 윗분들을 대신해 전달해야할 축의금 봉투가 꽤 많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그만두는 것이 아닌 탓에 나도 내 이름으로 축의금을 전달했다. 그래야 남은 회사생활이 편하기도 했고, 그동안 나에게 마음 써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뷔페라도 먹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시국이 시국인만큼 조용히 축의금 봉투만 전달하고 돌아왔다.
두 번째는, 같은 업무를 하며 서로에게 큰 도움을 주고 받았던 옛 동료의 결혼식이었다. 지금은 다른 기관으로 전출을 가는 바람에 같은 곳에서 일하지 않지만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는다. 내가 그만두고 나면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을 테지만, 내 기억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겨우 몇 만 원을 아끼기 위해 마음에 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필 그 날이 공무원 시험날이라 결혼식에 가지는 못하고 봉투로 성의만 겨우 전달했다.
세 번째는, 오늘 받은 따끈따끈한 입사 동기의 청첩장이다. 치졸하게도 마음 속에서 두 명의 내가 싸우기 시작했다.
"다신 볼 일 없는 사람이야." "그래도 동기잖아." "그 5만원이 1년 뒤의 너한테 꼭 필요할지 몰라." "그치만 청첩장을 받았는걸?" 나는 청첩장에 내 이름을 쓰고, 우리 부서 앞까지 찾아와 부끄럽게 청첩장을 전달하는 동기에게 차마 "나는 곧 그만둘 것이고, 너와 나는 다시는 볼일이 없을 테니 나는 축의금을 하지 않을 것이야."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그래, 축하한다! 별일 없으면 갈게."였다.
이 곳에서 일하는 동안 정말 숱한 결혼식과 장례식들을 보아왔지만, 나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1.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만 축의금 또는 조의금을 낸다.
2. 같은 부서에 있어도,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면 축의금을 내지 않는다.
3. 같은 부서에 있다면, 조의금은 무조건 낸다.
나는 결혼은 할 거지만 결혼식은 하지 않을 계획이다. 고로, 축의금을 받지 않을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돌려받지 않아도 될만큼 기쁘게 축의를 할 수 있을 때만 축의금을 내겠다고 결심했고, 지금까지 나는 이 원칙을 지켜왔다.
하지만, 퇴사를 앞두니 이 원칙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축의금이라는 것이, 언젠가 나의 한 달 핸드폰요금, 한 달 교통비가 되어줄 돈이라고 생각하니 한번 더 고민하게 된다. 이렇게 몇 만 원 때문에 구질구질해지는 것이 싫어서 사람들은 꾹 참고 회사를 다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구질구질하더라도,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내가 그만둘 때까지 결혼식은 제발 그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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