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공무원 퇴사일기] 후드티 입어도 돼요?

수트레스 2021. 4. 2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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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5

첫 인사발령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 날, 생각지도 못한 카톡을 받았다.

내가 발령받은 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언니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우리는 일면식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연락이 더욱 고마웠다. 언니는 나와 같은 시험을 쳤지만, 성적이 좋아 먼저 발령을 받았는데 언니도 시험 동기인 내가 같은 과로 발령난 것이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언니 덕분에 첫 출근도 전에 듬직한 선배가 생겼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는 말에, 제일 처음 한 질문은.

「후드티 입어도 돼요?」 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에게는 정장이라곤 면접용 검은 정장 하나 뿐이었다. 옷장에는 후드티나 남방류의 편안한 옷들만 가득했고 나는 뭘 입고 출근해야할지 막막했기에 그게 정말 절실하게 궁금했다.

언니는 조금 당황하는 듯하더니, 후드티를 입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절망적이었다.

출근을 해보니, 언니의 말이 맞았다. 후드티를 입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가끔 누군가가 후드티를 입고 출근하는 바람에 한소리 들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후드티를 입고 와서 잔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공무원만큼 복장이 자유로운 회사는 드물다. 통상적으로 후드티와 노출이 심한 옷만 피하면 다 OK다. 물론 TPO(Time, Place, Occasion)는 지켜야 한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청바지+남방+운동화 차림으로 출근한다.

머리스타일도 마찬가지다. 히피펌을 한 사람, 빨간색으로 염색을 한 사람도 있다. 요즘 그런 것들을 지적하면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지적을 하지 않는다.

어떤 분은 민원인을 대하는 업무를 하는 사람일수록 갖추어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갖추어 입지 않으면 무시를 당한다고. 덩치가 크거나, 가만 있어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아무렇게나 입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포스를 풍기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옷이라도 갖추어서 없는 카리스마를 만들어보자는 뜻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내가 민원대에서 일할 때 그렇게 사람들이 나를 막 대했던 것일까. 그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옷장에는 청바지만, 신발장에는 운동화만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 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지옥이다. 정장바지, 새하얀 블라우스, 팔도 잘 안 움직여지는 불편한 재킷을 입고 출근을 할 때면 정말 내가 회사 체질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어떤 날은 행사가 끝나고 갈아입을 옷을 따로 챙기기도 한다. 나는 정말이지 정장이 싫다.

퇴사를 하게 되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쇼핑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복장이 자유롭다고 해도 쇼핑을 가면 '이 옷을 출근할 때 입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야한다. 목이 너무 많이 파져있는 건 아닌지, 청바지가 찢어져있지는 않은지. 생각보다 고려해야할 것들이 많다. 이제부터 내 눈에 예쁜 옷은 그냥 사면 된다. 문제는 돈이 없을 것이라는 것...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퇴사하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 마구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구청 건물에 들어가는 것. 분명히 말하지만, 반항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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