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공무원 퇴사일기] 전화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수트레스 2021. 5. 10.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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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하루 종일 울리는 벨소리는 나에게 특히 심한 스트레스를 준다.
벨소리를 워낙 싫어하는 탓에 평소에는 핸드폰은 진동, 카톡은 아예 무음으로 해두는 데다, 원래 전화통화를 즐기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전화들(가끔 육두문자가 쏟아지는 전화도 있다)을 다 받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 전화를 그냥 받아서도 안 된다. 전화응대 요령에 따라서, 친절하게 받아야 한다.

얼마나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매년 전화친절도 조사를 통해 직원들의 전화 친절을 평가하고, 피드백을 준다. 평가 기준은 대충 이렇다.

1. 전화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고, "반갑습니다(감사합니다). ㅇㅇ과 ㅇㅇㅇ입니다." 하고 또박또박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다.
+ 4회 이상이 울린 후에 전화를 받은 경우 "늦게 받아 죄송합니다."를 덧붙여야 한다.
2. 민원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긍정적인 호응과 함께 경청하며, 문의사항에 대해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3. "더 궁금하신 사항 없으십니까?"하고 추가문의 여부를 확인한다.
4. "감사합니다." 등의 종료멘트를 하고, 고객이 전화를 끊은 후에 전화를 끊는다.

실제로 근무를 해보면 전화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는 것부터 쉽지 않다. 전화벨 3번이 울리는 시간은 겨우 5~6초. 그 안에 하던 일을 멈추고 수화기를 집어 들어 상냥한 첫인사를 건네야 한다.

받자마자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감사합니다"를 먼저 외치는 것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습관이 되고나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쓰게 되었다.

다년간 숙련되어 이제 저 정도 응대요령쯤은 자동으로 나오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주인이 자리를 비웠을 때 울리는 전화다. 전화의 주인이 자리에 있든 없든, 그 전화는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아져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대신 받아야만 한다. 세 번이 넘어가는 전화벨 소리를 견디는 것이 힘들어서 최대한 남의 전화를 당겨 받으려 노력하지만, 가끔은 "다신 남의 전화를 받나 봐라."라며 이를 갈게 되는 순간도 있다.

전화를 세 번이나 돌리는 바람에 지금 똑같은 걸 세 번째 설명한다며, 전화를 돌리기는커녕 당겨받은 나에게 분노를 쏟아부을 때. 물론 화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화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전화를 돌린 그 작자에게 내야 한다.

한 번은 전화를 당겨받았는데 술에 취한 아저씨가 30분이 넘도록 지난 선거에서 어떤 당이 압승을 거뒀다며 이게 나라냐고 울부짖었다. 이런 전화는 내 업무와는 1도 상관없지만, 딱히 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에 다른 과로 돌려주지도, 끊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나에게 회사에서의 하루는 그야말로 전화와의 전쟁이다. 한 번은 전화를 받는 것이 너무 싫어서, 전화가 없는 세상은 어떨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늦는다는 전화를 할 수 없기에, 최대한 빨리 약속 장소로 갈 것이다. 장소를 잊어버려도 전화로 확인할 수 없으니 약속을 더 소중하게 기억할 것이다. 목소리라는 익명성에 숨어서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처음으로 기술의 발전이 안타까운 순간이다.

그럼에도 오늘도 꿋꿋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극적인 민원인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감정노동자들이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벨소리가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그러려면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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