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공무원 퇴사일기] 마지막이 처음처럼 서툴더라도

수트레스 2021. 6. 2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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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구청에 출근하는 마지막 월요일이다. 다음 주 목요일까지는 출근을 할 테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는 하나 남은 소중한 특별휴가를 쓸 예정이기 때문에 월요병을 겪는 건 정말 오늘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이 코 앞으로 다가오니 이 곳에서의 첫 순간들이 떠오른다.

발령을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알차게 보내려고 컴활 1급 자격시험을 치러 갔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시험을 치고 나오니 낯선 번호로 부재중 전화 두 통이 와있었다. 드디어 발령이 났구나, 직감했다. 전화를 걸어보니 역시나 구청 인사담당자의 전화였다. 두 번이나 전화를 받지 않다니, 첫 출근도 전에 찍혔다 싶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첫 출근일과 집합장소에 대해 듣고 전화를 끊었다. 어쩌면 나와 잘 맞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 뒤, 첫 출근날. 면접 이후 옷장에 전시해두었던 정장을 꺼냈다. 면접 때는 어쩔 수 없이 치마 정장을 입었지만, 아무래도 H라인 스커트를 입고 하루 종일 근무할 자신은 없었다. 고민 끝에 치마 대신 정장 바지를 입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웬걸, 치마를 입지 않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 외에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소심한 나는 어쩐지 주눅이 들어버렸다.

임명장을 받고 나니 각 부서에서 신규직원들을 데리러 왔다. 나를 데리러 온 선배님을 쫄래쫄래 따라가 부서를 한 바퀴 돌며 첫인사를 드렸다. 낯을 심하게 가리면서도 밝아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애써 환하게 웃었더니 '발랄한 친구'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을 들었다.

처음으로 내 자리라는 걸 갖게 되니 낯설지만 기분이 좋았다. 계원들도 따뜻하게 환영해주었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하지만 한심하게도 그날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커피 타는 일뿐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거나 일을 알려주기를 기대하며 나는 하루종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긴장을 해서인지 하는 일도 없으면서 배는 자꾸 고팠다. 배가 고플 때는 업무시간이라도 잠깐 나가서 뭘 먹고 와도 되는 건지, 그것조차 알지 못해서 평소엔 먹지도 못하는 믹스커피만 연거푸 마셔댔다. 그때의 나는 직장인으로서 정말 순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순수한 시절은 잠깐이었고, 빠른 시간 내에 뻔뻔해지는 바람에 7급 같은 9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시간은 미친 듯이 흘러갔고 나는 7급 같은 9급이 아니라 진짜 7급이 되어서 이렇게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있다. 마지막은 처음이라 순수했던 처음처럼 서툴지도 모르겠다. 부디 이번에도 빠른 시간 내에 뻔뻔해져서 이번엔 부자 같은 백수로 불렸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진짜 부자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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