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백수 1일 차. 퇴사 일기의 마지막 이야기다.
아직은 아무것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푹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하는 꿈을 꾸다 7시에 눈을 떴다. 출근하기 싫어 몸부림치던 아침은 이미 잊어버리고,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억지로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9시쯤 일어나 명상과 요가로 상큼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간단히 고구마로 아침을 때우고, 어제 못 본 성시경의 영상들을 보며 이루고 싶은 일 100번 쓰기를 했다. 50번밖에 쓰지 못했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백수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짜파게티를 끓여 엄마 아빠와 둘러앉아 먹었다. 앞으로 나의 점심은 이렇게 소박하지만 편안하겠구나. 그 순간 또 한 번 내가 백수라는 게 실감 났다. 아빠가 짜파게티를 잘 끓였다며 흡족해했다. 라면을 잘 끓이니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다.
점심을 먹은 다음, 50번을 마저 쓰고 나니 조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조카가 집에 갈 때까지 뭘 하긴 글렀다는 뜻이었다. 예상대로 우리 깜찍한 조카는 이모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야 언니가 조카를 데리고 집에 갔다. 설거지를 하고 어제 못 본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틀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9시.
챌린저스라는 앱에서 돈을 걸고 주 3회 만보 걷기 챌린지를 하고 있는데 이번 주에 단 하루도 만보를 걷지 못했다. 부랴부랴 이어폰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 꼬박 1시간 반을 걸은 후에야 만보를 채울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지금 이 일기를 쓰고 있다. 누가 오늘 뭘 했냐고 물으면 퍽 난감하다.
회사에 매여있었던 9시부터 18시까지의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신이 인간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놀고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아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백수 1일 차에 깨달은 것 한 가지. 시간은 붙잡지 않으면 그냥 사라져 버린다. 시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리자. 조급하게 살겠다는 게 아니라 놀더라도 최선을 다해 시간을 알차게 쓰겠다는 뜻이다.
내일부터는 미리 얻어둔 작업실로 꼬박꼬박 출근해야겠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나조차 알 수 없어서 더욱 궁금하고 기대된다. 내 인생도 한 편의 재미있는 드라마가 되길 바라며, 퇴사 일기는 막을 내린다.
함께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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